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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통해 본 시간관리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개념과 시간관리 (2) 성찰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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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4-03 19:21 조회 29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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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

기대로서 존재하는 미래의 시간관리 못지 않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개념으로부터 배운 중요한 통찰은 시간을 관리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알차게 꽉꽉 채우기 위한 노력 못지 않게 ‘과거 일의 현재’로서 기억에 대한 성찰도 중요한 주제임을 알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성찰(省察, introspection)할 지에 대해 다음의 문장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행위를 보고(視其所以) 행위의 동기를 따져 보며(觀其所由),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핀다면(察其所安)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人焉廋哉, 人焉廋哉)‘

논어 위정(爲政)편의 이 문장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 지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의 행동(所以)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백마디의 말보다 그의 행동이 그를 설명하는 가장 믿을만한 근거라는 것이다. 대단한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정말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한 행동이다. 물론 말도 그의 진심을 담은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행동이다.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말은 그의 행동을 앞설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 진실에 다가서기는 어렵다. 행위는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못된 마음을 먹고도 좋아 보이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를 살피는 것을 넘어 이러한 행위를 왜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보다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즉 그 행위가 유발되게 한 바(所由) 즉 동기가 어떠했는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위를 했는가를 넘어 행위의 하게 된 의도와 목적을 살피는 것이 더 깊은 성찰을 위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성찰은 이 동기(所由)를 살피는 것에서 그치곤 한다. 그래서 잘못된 행위라도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내 연구주제였던 비윤리적 친조직행위(unethical pro-organizational behavior)는 비윤리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동기가 조직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 행위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행위를 보는 사람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됨을 보여준다)

하지만, 孔선생님은 성찰을 위해 동기를 살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동기보다 더 깊은 마음의 심연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바로 나 자신이 편안하게 여기는 바(所安)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진짜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피면 누구도 진실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성찰은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핀다(察其所安)’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귀결된다. 행위와 동기의 심연에 놓인 ‘편안히 여기는 바(所安)’는 무엇일까?

성찰을 위해 ‘내가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핀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힌트를 나는 논어에서 이 문장의 바로 앞에 소개된 내용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종일 안회(顔回)와 더불어 이야기를 했는데 내 말을 어기지 않아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회는 물러간 후에 나는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그는 여전히 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회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선생님인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가르침을 그대로 하려는 안회의 모습은 어리석어 보였지만 누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을 따르는 안회의 모습을 보며 공자는 그가 누구보다 훌륭한 제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는 본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안회의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진심에 의한 행위임을 보았기 때문 아닐까? 즉 안회는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안식하게 했기 때문에 스승을 따르는 행위를 한 것이고, 그의 진심을 보았을 때 스승인 공자는 제자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제자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된 것 아닐까?

결국 내가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핀다’는 것은 나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 지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진심을 살피는 것, 혹은 나의 안식이 어디에 있는 지를 살피는 것에 대해 나는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에서 보다 명확한 의미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기도 했고, 도둑질과 같은 불량한 일도 있었지만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기도 했고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와 삶을 누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로 개종 후 히포라는 지역의 감독이 되어 남은 삶을 수도생활로 보낸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해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 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향하게 될 때 그가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나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찾은 안식은 그가 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와 명예와 같이 시간 속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향하게 될 때 그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내가 편안히 여기는 바(所安)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결국 내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통해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바꿔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입니다’라고 하는데 ‘무게는 반드시 밑으로만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향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지향과 관련되는 것임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찰을 위해 ‘편안히 여기는 바(所安)을 살핀다는 것은 내가 어디서 안식을 얻는가 혹은 내가 어디서 안식을 얻으려 하는가를 살피는 것이며, 이는 내가 삶의 지향을 무엇에 두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는 행위나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한 것을 벗겨내고 나의 진짜 마음, 나의 진심을 살피는 것이 바로 성찰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위와 동기 그리고 그 밑에 놓여진 진심을 살필 때 인간은 누구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이 성찰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논어에 대한 주석은 ‘편하다는 것은 즐기는 것이다(安所樂也)’라고 설명하는 지도 모르겠다. 즉 성찰은 드러난 나의 행위(所以)와 행위를 유발한 동기(所由)를 넘어 편안히 여기는 바, 혹은 그가 즐기는 진심(所安)을 밝힘으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진정성 혹은 진성(authenticity) 리더십의 논의에서 왜곡없이(unbiased)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self-awareness)하는 것에 대한 통찰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한다. 성찰은 그래서 내가 지향하고 있는 진짜 나의 모습에 직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찰의 의미는 진짜 나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말과 행위, 그리고 그 밑에 있는 동기를 벗겨내고 나의 진심에 직면하는 것임을 이해해도 여전히 한가지 더 고민해야 할 이슈가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진심을 ‘살필(察)’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중국 선교사였던 James Legge(1815-1897)의 번역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였지만 중국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유학과의 보완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던 (이러한 입장을 補儒論이라고 한다) 그는 한문을 배워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를 번역했는데, 위정편의 視-觀-察에서 察을 ‘Examine’으로 번역한다. (Examine in what things he rests.) 즉 자신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바에 대해 살핀다는 것은 내가 편안히 여기는 바, 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향에 대해 시험을 쳐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기와 어려움 앞에서 혹은 유혹 앞에서 나의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인 것이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쌓아온 자기 인식과 믿음은 사실 ‘시험을 쳐 봐야’ 진짜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결국 성찰한다는 것은 나의 행위와 행위의 동기, 그리고 그 깊은 심연에 감춰진 나의 진심 혹은 나의 진실에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숨김없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기억에 대해 부끄럽지만 그렇게 직면할 때 나는 비로소 성찰하게 되며, 성찰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찰은 마치 남이 나를 보듯이(이를 타인의 관점, 즉 客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나의 진실에 직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직면에서 드러나는 나의 민낯을 부끄럽지만 사랑하는 것이 성찰을 통해 다시 미래를 향한 기대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간관리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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